문화예술과 기술의 융합 분야에서 교육에 입각한 실천을 하는 예술가들의 활동과 접근방식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간결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터뷰 내용, 어조, 호칭 등을 편집했다.
전유진은 영화음악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부터 사운드, 퍼포먼스, 기술을 기반으로 한 뉴미디어 작업을 발표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혀왔다. 2015년 아티스트그룹 서울익스프레스를 결성하여 《언랭귀지드 서울》,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 등 실험적인 서사구축에 주목하는 다원예술공연을 만들었다. 활동 초기부터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워크숍과 교육프로그램 개발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왔으며, 2017년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을 설립하여 기술문화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들을 이어가고 있다.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은 오랜시간 도심제조업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어온 을지로라는 지역에 위치해있다. 을지로라는 물리적 공간 뿐만 아니라, 메이커 문화, 미디어아트 등 기술을 활용하는 영역에 만연한 남성편향적이고 위계적인 문화에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과 '기술'이라는 두 키워드의 결합을 선언적 의미로 제시한다. 워크숍, 전시, 세미나, 강연, 연구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술에 대한 흥미와 리터러시를 키우고, 주체적인 사고와 새로운 관점으로서 기술의 젠더적 접근-페미니즘의 기술적 실천을 도모하고자 한다.
인터뷰 진행일: 2020년 10월 31일
장소: 을지로 세운 메이커스 큐브,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이하 여성기술랩)의 활동이 받는 오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전유진: (여성 작가도 많이 활동하는 분야인) 미디어 아트에서 왜 굳이 여성을 얘기하는가? 수공예와 여성을 위한 기술은 어떤 차별점을 두고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을 여전히 받는다. 우리는 high tech를 지향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구분 자체를 문제시하는 입장이다. low tech와 high tech를 앞서처럼 구분하고 low tech를 여성과 결부짓는 사고방식은 수공예나 이른바 “여성의 노동”에 대한 저평가를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계속 있어서 내가 여기에 대해 화를 낼 게 아니고 정말 알기 쉽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아침: 수공예와 하이테크의 대비뿐만 아니라 코딩 같은 이른바 하이테크 분야에서도 프론트엔드는 여성의 기술, 백엔드는 남성의 기술 같은 식으로 가치를 다르게 부여하는 기제가 있다.
전: 굉장히 산업적인 시각이다.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기술에 가치를 매기는 방식인데, 예술계 안에서까지도 그런 관점을 수용하는 데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결국 기술 담론, 기술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중요하고, 활동을 시작한 2017년에는 기술 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는데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모여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담론 관련 활동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2019년에는 프로세싱 커뮤니티 데이를 한국에서 주최했고 토론도 많이 하고, 토론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한국 공교육에서는 토론식으로 교육받은 게 아니니까, 어떻게 토론의 여건을 만들지 관심이 많은데 올해는 힘들었던 편이다. 그보다는 뭔가 만들어서 보여주거나 교육 리터러시를 쌓는 활동을 더 많이 했다.
고: 코로나19 등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다. 준비 중인 활동을 못하게 된 경우도 있었는지?
전: 못했다기보다는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4월에 <f항목 추가중>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코로나19 상황이) 최고조에 달했다. 매년 기술연구모임을 모집해서 한 두 시즌 정도 진행하고 있는데, 당시 모임은 2019년 10월에 ‘여성이 기술을 이용해서 여성을 위한 무언가를 만든다’는 광범위한 주제로 작가,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 일곱 명 정도를 모집했다. 각자 주제를 갖고 연구해서 내년, 그러니까 2020년 3월 정도에 발표를 하려 했다. 그 전까지는 발표를 전제하고 모임을 만든 적이 없는데 외부에서 기술랩의 활동을 궁금해하는 시선도 있어서 그러면 한 번 보여주겠다는 계획이었다. 전시장도 (여성기술랩이 입주한)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 빌릴 수 있는 데가 있어서 전시, 토크도 기획했는데 상황이 심각해지고 일정도 계속 바뀌어서 어느 순간 결심을 내렸다. 안 하거나 미루지 않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돌파를 하겠다고.
당시 송호준, 김성수와 함께 진행 중이던 <청계시소> 프로젝트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송호준은 트위치 방송에 빠져서 <청계시소> 제작기를 스트리밍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서 약간 세뇌 당하듯이 나도 그러면 이번에 <f항목 추가중>을 완전 온라인 방송으로 바꿔야겠다, 경험은 없지만 해보면 되지, 싶었다. 송호준 작가가 방송에 관심이 있는 몇몇 작가를 대상으로 온라인 스트리밍 워크숍을 긴급으로 열고 관련 지식을 공유해주었다. 애초에 지원사업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었던 영향도 있다. 1주일 정도 온라인 방송국처럼 운영해보자고 작가들과 협의하고 급하게 장비를 사서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고 참여자들도 깨알같이 잘 해줘서 만족했다. 애초에 완성도 있는 작품보다는 연구과정을 발표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더 순탄했던 것 같다. 이런 색다른 시도를 통해서 자신도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참여 작가들이 한 것 같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한 사람도 있다.
<f항목 추가중>은 올해의 특별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일종의 돌파구다. 당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도 한창 이슈였는데 코로나19까지 합쳐진 상황이었다. 기술연구모임이 물론 3주에 한 번씩 모여서 연구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이지만 어떤 울분과 여성으로서 느끼는 여러 가지 어려움, 애환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성착취 사건 때문에 가장 서로를 만나고 싶은데도 코로나19로 만날 수 없고 각자 쌓이는 분노를 표출하는 자리를 만들 수가 없었다. 이메일, 온라인 미팅, 디스코드 채팅 등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아무 것도 못 하는 무력감, 그렇게 답답하게 넘어간다는 게 힘들었다. 다른 모임 참여자들도 나와 비슷한 목마름이 있어서 <f항목 추가중>을 온라인으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 호응하고 최선을 다해준 것 같다. 즐겁게 일을 했고 재미있었다.